누가복음 24장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시편을 비롯한 모든 성경에 쓴 바 자신에 관한 것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중심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데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신약의 각종 서신서 등을 보아야 합니다. 거꾸로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의 말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은 훌륭한 믿음의 본보기들이고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쓴 이야기를 예수님의 말씀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성경이라고 바울의 말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한다던지 요한이나 베드로의 말을 통해 예수님을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볼 때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서신서들을 봐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나머지 성경들을 보고 해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객이 전도된 말씀이 되고 바울의 말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있게 되는 이상한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총론적이면서도 포괄적인 말씀이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알고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주님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므로 일부분으로 전체를 흔들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믿은 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여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병 고치는 은사를 말하고 하나님께서 교회 중에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 외에 능력을 행하는 자와 병 고치는 은사 등도 세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를 예로 하여 말씀드리면 바울의 말에 의하면 병을 고치는 것은 은사로 하나님이 병 고치는 은사를 주지 아니하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바울의 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본다면 병 고치는 은사가 없다면 믿는 자는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도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울의 말을 본다면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믿는 자 중에서 똑같이 기도했는데 병을 더 잘 낫게 하는 이는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누구든지 병이 있는 사람은 아무개에게 병 고침을 받으라고 세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 고향으로 돌아오셔서 하신 일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누가복음 4장)”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신 이유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 했다는 것이고 자신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유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잊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은 들어보기 어렵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며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는 복음은 실종 된채 속죄의 복음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속죄의 복음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복음입니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여 거듭 강조하며 중복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여러 부분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속죄의 복음이 중요하다 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른 것들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즉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과 자유하게 하는 것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들이 서신서에 쓴 것보다도 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신 분으로 속죄의 복음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죄자이실 뿐 아니라 왕이시기도 하시며 대제사장이시기도 하시며 선지자이시기도 하시며 탁월한 선생님이기도 하시며 목자이시며 전도자이십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하면 큰일 날 소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만 보는 것이 문제이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보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속죄자로만 보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다양한 역할을 제한하는 편협한 것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만 보고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거의 대부분 속죄의 복음에 대해서만 들음으로 예수님의 다양한 역할과 직분에 대하여는 속죄의 복음만큼 잘 알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마귀와 질병에 눌린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는 예수께서 행하시며 말씀하신 만큼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복음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로 구분하여 심판하는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은 곧 내게 한 것으로 그것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고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과 하지 아니한 것으로 심판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성경이 분명하고 일관되게 말씀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모르실리가 없으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너희가 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냐 너희가 나를 안다고 생각하느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돌볼 줄 안다면 너희를 나를 믿는 자로 나를 아는 자로 인정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권력 있는 자에게 부자에게 자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에게만 잘하고 영양가(?) 없고 힘없는 자에게는 곁눈조차 주지 않는다면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가난한 자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돌볼 줄 모른다면 그는 나를 알고 믿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모두에게가 아니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 모두를 돌볼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돌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다른 말씀들을 보아야 합니다.
서신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서신서에 집중한 까닭에 예수님의 다양한 말씀과 가르침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지고 있는 듯합니다. 산상수훈의 엄청난 가르침은 그림의 떡으로 행하지 않아도 될 말씀으로 알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께서는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누가복음 16:17) 하셨고,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21:33, 마태복음 24:35)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소홀히 여기면서 성경을 보는 것은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서신서가 쓰여질 줄 모르고 근시안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청중들과 제자들에게 시대적 상황에 맞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만 유용한 말씀이고 시간이 지나면 버려지는 유행처럼 쓸데없는 골동품처럼 되는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같은 성경이라도 사도들의 서신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충하는 부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바른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다른 말씀들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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