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활인가
[왜 부활인가] 2016. 9. 8. 목
고린도전서 15장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현대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복음이라고 전했고 우리는 거의 모두 그것을 복음으로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일 중 십자가를 강조한다면 이는 복음의 초점이 빗나간 것임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예수께서 하신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보면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전하기보다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더 중점적으로 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사도가 되었던 바울이 전한 복음도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이나 나중에 사도가 된 바울이 전한 복음은 똑 같았는데 그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왜 부활이냐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유대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 보여주시기를 구할 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마태복음 12:39)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바다에 내던져졌을 때 큰 물고기 뱃속에 삼 일을 있다가 나온 것처럼 무덤에 삼 일을 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께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주실 것이 없다 하셨습니까. 그것은 부활만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확실한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장)” 하며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말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는 태초에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께서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이를 요한 사도는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한복음 1장)”라고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 병든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만으로 고친 기적, 베데스다 못가의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친 기적,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친 기적,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린 기적 즉 일곱 개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또 표적을 구할 때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인 것을 믿게 할 수 있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다시 말하면 부활의 표적 밖에는 없다 하신 것은 예수님 생전에 그렇게 많은 기적을 보았던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도망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대답은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울 사도는 “16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사도행전 17장)”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로 부활을 택하신 것입니다. 부활이 믿을 수밖에 증거는 많지만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는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받아 확실히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뇌사 상태이거나 기절한 것이면 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형집행의 전문가인 로마 군인들 앞에서 확실히 죽으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은 없습니다. 부활의 전제 조건은 완전한 죽음입니다.
다음으로는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실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도망갔고 두려움에 떨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귀신이나 유령을 보았더라면 그렇게까지 기쁨으로 순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동생 야고보와 예수님을 적대시 하며 예수 “예”자라는 소리만 들어도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 했던 바울 사도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으며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이냐고요. 말되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난 후에는 완전히 변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빈 무덤입니다.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 그를 추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모든 사람이 믿을 만한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하는 증거입니다.
세 번째 대답은 사도들이 자신들을 부활을 증언할 사람이라고 전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22).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이 따로 강조된 적은 없고 언제나 부활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이 함께 전해질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쓴 서신서에 십자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비추어보니 십자가의 의미가 더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일생이 십자가로 끝났다면 큰 능력을 행하고 훌륭한 삶을 살았던 분에 대한 추모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죽지 않아도 될 자신의 아들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가장 비참한 순간이며 죄를 대신 지는 아들의 기도를 들을 수 없어 버려야 하는 안타까운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온 땅에 어둠이 세 시간 정도 임했고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누가복음 23:44-45). 어둠이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아들 예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야 그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 후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신 것은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사도행전 2:24)이라고 베드로는 증언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 죽은 것을 전하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아들이 살아난 것을 전하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우리의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죽은 예수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에 대하여 전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이해해야 복음의 초점이 바뀔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인들이 전파하는 것도 믿음도 헛되며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네 번째 대답은 예수님의 부활만이 믿음을 믿음 되게 하고, 사람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는 확실한 처방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무덤에 시체로 계셨다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권세를 가진 사탄이 이긴 것이 되므로 예수께서는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되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만이 완전한 믿음이고 죄를 이기는 믿음입니다. 믿는 자가 죄 사함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께서 자기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죄와 싸워 이겨야 할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이 이기는 믿음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한복음 2:22)고 요한 사도는 기록했습니다. 다섯 번째 대답은 예수님의 어떤 말씀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을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이것이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6:21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으로 말씀하셨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살아나야 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가 아니라 반드시 살아나야 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귀에는 예수께서 죽으신다는 이야기만 들렸을 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제자들은 알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보기는 보지만 ‘아니 여기에 그런 말씀이 있었어, 여기는 내가 수십 번도 더 읽은 곳인데’ 하며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했으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으나 알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으나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즉 부활의 눈으로 보아야 비로소 이해되는 말씀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저 또한 부활의 눈으로 볼 때에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로마서 14:9)”는 말씀이 인지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주님이신데 “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활의 관점으로 볼 때에야 비로소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유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기 위함이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시므로 죽은 자의 주도 되셔야 그들의 삶에도 산 자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줄 수 있다. 또한 산 자의 주가 되시려는 것은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5)”는 말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의 눈으로 보아야 보이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여섯 번째 대답은 부활하셔야 예수께서는 사람들 속에 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예수는 사람들 속에 거하실 수 없고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린도후서 5:5)” 했습니다. 믿는 자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할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어떤 믿음이라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에 계시는 믿음입니까. 영접할 때 들어가실 수 있고 믿을 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죽은 예수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바울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하는 믿음은 “네 믿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믿느냐 그러면 다시 살아나신 예수는 네가 영접한대로 네 속에 거하실 것이다”라는 아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예수라도 아기 예수, 능력을 행하신 예수,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부활하신 예수,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임금 예수를 구분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떤 예수를 믿는지 아시고 구분하시며, 부활하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 역사하십니다.
일곱 번째 대답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보고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도망갔습니다. 이들이 변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구주만이 아니라 주와 그리스도, 임금과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어느 하나만 인정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그리스도와 구주만 인정하고 자신의 삶에서 주와 임금이 되기를 거절해서는 주와 임금이 되셔서 다스리는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변화는 자신이 주인 되어 살던 삶을 회개하여 버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주로 시인하고 영접하여 살 때에 일어납니다. 재물을 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던 초대교회의 모습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가 되셨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의 문제는 지식과 지혜에 한계가 있는 우리가 주인 되어 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부활의 주님이 주인 된 사람은 본질이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