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유대주의] 2024. 6. 23. 주일
로마서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약 이천 년이나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사방에서 돌아오게 하셔서 오늘의 이스라엘이 있게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선량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채 이천 년을 각 나라에서 나그네처럼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 왔습니다. 특히 유대인을 핍박하고 죽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아닌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칼로 바꾸어 사용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주셨기 때문에 죽으실 수 있었던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죽는 과정에서 부패한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과 그들의 뜻대로 동원된 극히 일부의 유대인들의 부당한 고소에 대하여 대항하지 않으셨을 뿐아니라 빌라도의 부당한 판결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목숨을 내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을 실제로 죽인 사람들은 이방인인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대인들이 죽였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8: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사람을 죽일 권한을 가진 빌라도가 죄 없는 예수님에게 사형판결을 내림으로써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는데 유대인 전체에게만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는 죄명을 씌워 그들을 핍박한 것은 어리석은 일 중의 어릭석을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셨는데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왜 지금까지 우리가 유대인을 정죄합니까. 예수께서 용서하셨으면 우리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해야 하는데 이는 쏙 빼놓고 유대인만을 말하는 것은 사탄의 완전한 속임수로 내노라 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이에 넘어갔습니다. 어거스틴과 루터가 반유대주의자였습니다. 특히 루터의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을 학살할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을 주었고 이는 현대 역사의 큰 비극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구약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목격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자기 생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감격해마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을 율법의 눈으로 윤리 교과서로만 본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예언의 말씀을 연구한 사람들은 그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유대인은 참감람나무이며 이방인은 우리는 돌감람나무로서 참감람나무인 유대인이 꺽인 자리에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참감람나무의 뿌리의 진액을 함께 누릴 수 있음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1948년 이스라엘은 독립국가가 되었고 1967년 6월에 예루살렘을 이방인의 손에서 찾았습니다. 오늘날 싸우고 있는 팔레스타인은 성경의 블레셋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메시아 구주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같이 살 수 없는 족속이 팔레스타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두 가지 일을 진행하십니다. 하나는 유대인의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대놓고 핍박한 기독교인들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접근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선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일이 먼저 있어야 유대인에 대한 선교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을 주축으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구약성경을 달달달 외우고 있었던 그들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시라는 복음은 그들이 알고 있던 성경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즐거움으로 인해 더욱 힘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을 중심으로 이방인들이 복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이 이방인들에 젼해졌을 때 이방인이 주죽인 되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성경의 문화에 뿌리를 둔 복음이 이방문화의 탈을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으며 그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습니다. 4세기 경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유대인과 유대교와의 교류를 불법화 했고 유대인들을 정죄했습니다. 이 반유대주의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반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언약을 대적하는 심각한 죄 중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예루살렘의 수복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의 때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한편 이스라엘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세계가 인권이라는 탈을 쓰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동성애와 각종 범죄를 죄가 아니라 하며 그 세력을 확산해가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이라는 악한 법령을 통해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라고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차별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눈여겨 봐야 할 이유는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일은 예수님의 재림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징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대 설교에서 종말론적인 설교를 듣기 어렵습니다. 두려움을 조장하는 설교가 대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론적인 말씀의 선포는 소망의 마침표가 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세상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다시는 슬픔과 사망과 고통이 없는 천국의 향연입니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장). 반유대주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