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이기는 부활의 새 생명] 2017. 12. 28. 목
로마서 6장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죽은 자는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듯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죄가 유혹할 때에 죄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현실적인 경험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나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면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생각만으로는 믿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로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내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만 강조하거나 알고 있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강조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알지도 못합니다.
죽지 아니하면 부활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그 부활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시킨 것은 죄에 대하여 죽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게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믿는 자를 연합시키신 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로마서 5장에 기록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에 대한 대표성을 믿을 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아담의 대표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본성과 마음이 타락한 상태가 되었다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도 거듭나서 옛 사람이 죽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자신이 타락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잘 믿으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았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것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부활의 새 생명만이 죄의 저주와 그 결과인 죽음을 이긴 생명입니다. 로마서에서 부활을 말할 때에는 거의 대부분 은사나 능력보다는 죄를 이기는 도덕적 생명의 능력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속을 아는 것만으로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부활의 새 생명만이 죄를 이깁니다.
골로새서 2장 12절은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하며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을 때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다 하십니다. 문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기는커녕 너무 무기력하다는데 있습니다. 교리적으로만 믿는 사람은 평소에 부활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기독교인이 불교의 교리를 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알지만 믿지 아니하므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를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4장 13절에서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했습니다. 우리는 믿는 것을 말하고 아는 것을 말합니다. 모르는 것을 믿을 수 없고 믿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는 부활의 생명은 교리적으로 아는 자에게가 아니라 믿고 행하는 자에게 실제가 됩니다.